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우리의 여행이 되었다
2013년, 우리 부부는 세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당시의 여행을 지금이라도 기록을 남기려고 합니다. 기억만으로 쓰기에는 너무 오래전 일이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1만 7천 장이 넘는 사진과 출발 전에 만든 계획표가 남아 있습니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니 여행의 큰 장면은 떠오르지만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길로 이동했는지까지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연재는 기억을 억지로 채우는 여행기가 아닙니다. 사진의 촬영일, 당시 붙여 둔 폴더 이름, 계획표와 몇 가지 남아 있는 기록을 맞춰 보며 우리가 실제로 지나온 길을 다시 찾아가는 기록입니다.
출발 전에 그렸던 여행
처음 계획은 지금 남아 있는 실제 여행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필리핀에서 시작해 태국과 인도를 거쳐 이집트로 가고, 터키와 그리스에서 유럽 여러 나라를 지난 뒤 스페인으로 향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를 거쳐 미국으로 가서 2014년 1월 한국에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계획표에는 인도에서 두 달을 보내고 남미 여러 나라를 차례로 여행하는 일정까지 적혀 있습니다. 출발 전의 우리는 꽤 먼 미래까지 여행의 모양을 정해 놓았습니다. 계획표만 보면 여행은 정해진 선을 따라 움직이는 일처럼 보입니다.
계획을 바꾼 이유도 있었습니다
인도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인도에서 여성과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공격 사건이 크게 알려졌고, 아내와 함께 여행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도를 포기했습니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럽에 머물던 중 이집트의 폭동과 소요 소식을 접했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반대로 계획에 없던 선택이 여행의 가장 좋은 기억이 되기도 했습니다. 필리핀 바기오에서 영어 어학연수를 받을 때 은퇴 후 공부하러 온 일본인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분에게 크루즈 여행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편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가 더 빠르고 편할지는 모르지만, 값도 배편이 더 저렴했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12박 13일의 대서양 횡단 크루즈는 지금 돌아봐도 여행에서 가장 잘한 결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정말 대단히 재미있었습니다.
사진에 남은 실제 여행
실제로 남은 사진 속 동선은 처음 계획과 크게 달랐습니다. 필리핀 다음에는 싱가포르, 캄보디아, 라오스와 말레이시아로 이어졌습니다. 계획에 있던 인도와 이집트, 남미 여러 나라는 가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덴마크와 대서양 횡단 크루즈는 최초 계획표에는 없지만 실제 여행에 들어왔습니다.
| 처음 계획사진으로 확인되는 실제 여행 | |
| 2014년 1월까지 여행 | 2013년 11월 전후 귀국 |
| 인도·이집트·남미 포함 | 동남아시아와 유럽 체류 확대 |
| 스페인을 거쳐 남미로 이동 | 덴마크에서 크루즈로 대서양 횡단 |
| 마지막에 미국 서부 여행 | 마이애미·뉴욕·워싱턴을 거쳐 미국 서부로 이동 |
모든 변경 이유가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선택은 안전을 위한 것이었고, 어떤 변화는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이 새로운 가능성을 알려준 덕분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계획표와 다른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고, 바로 그 달라진 길이 우리가 실제로 살아낸 여행이라는 점입니다.
기억보다 기록을 먼저 믿기로 했다
이번 정리를 위해 사진 17,218장의 기본 정보를 모았습니다. 같은 파일을 가려내고 나니 서로 다른 사진은 14,742장이었고, 날짜별로 빠르게 살펴볼 수 있도록 연락처 시트 722장도 만들었습니다. 사진에는 위치 정보가 없고 카메라 시계가 현지 시간에 맞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어 촬영일만으로 모든 것을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태국처럼 번호가 붙은 폴더는 있지만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구간도 있습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사이의 이동 시기와 맞물리지만, 자료가 없는 이상 어느 도시에서 무엇을 했다고 단정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국가 사이의 날짜가 하루 이틀 겹치는 곳도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틀린 기억을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포장하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는 편이 이 기록의 목적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따라 다시 출발합니다
다음 글부터는 필리핀 바기오에서 시작합니다. 긴 여행의 첫 생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원헌드레드 아일랜드로 떠난 하루와 바기오를 떠나 마닐라로 향한 시간을 사진 순서대로 꺼내 보려고 합니다. 이후 싱가포르와 앙코르와트, 방비엥과 루앙프라방, 카파도키아와 산토리니, 유럽의 여러 도시, 대서양 크루즈와 미국까지 이어집니다.
이 글들은 완벽한 여행 안내서가 아닙니다. 2013년의 장소와 정보가 지금도 같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대신 오래된 사진 속에서 우리 부부가 실제로 보고 지나온 장면을 찾고, 기억나는 감정과 확인되는 사실을 구분해 남기려고 합니다. 즐거웠던 일뿐 아니라 말레이시아에서 겪었던 강도 사건처럼 좋지 않았던 기억도 숨기지 않고 차례가 오면 적어보려 합니다.
계획표는 우리가 출발하도록 도와주었고, 계획에서 벗어난 순간들은 우리의 여행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2013년의 첫 사진부터 다시 길을 걸어보겠습니다.